장강명 작가의 ‘먼저 온 미래’는 알파고 이후 바둑계의 변화를 취재한 르포다. 저자는 프로기사 30명과 바둑 전문가 6명을 인터뷰하고 바둑계에 ‘먼저 온 미래’를 통해 다른 분야에 닥칠 변화를 전망한다.
저자는 소설가며 소설 쓰는 AI가 나오면 어떻게 될지 고민한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고민이 개발자인 내 쪽으로 넘어왔다. 좋은 코드를 AI만 짤 수 있다면 사람의 역할은 뭘까. 아름다운 코드를 짜는 걸 가치로 여기는 개발자들은 어떻게 될까. 인상 깊었던 내용과 그때그때 든 생각을 짧게 기록했다.
코드는 craft인가
클린 코드로 유명한 로버트 마틴은 소프트웨어 개발을 장인정신으로 바라본다. 바둑 기사들이 “바둑은 예술”이라 믿었듯, “코드는 craft”라는 믿음으로 개발하는 개발자들이 있다.
암묵지의 균열
책은 인간만의 것이라 여겨졌던 암묵지에 AI가 들어오면서 가치 체계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 암묵지는 많은 인간 전문가에게 단순히 그들이 보유한 지식 상품이 아니라, 자기효능감과 자부심, 자존감의 근원이기도 하다.
달라진 작업 방식.
개발 방식이 달라졌다. 무에서 시작하는 경우는 없다. 항상 AI가 만든 걸 첨삭하거나 수정한다. 지금은 내가 AI의 결과물을 다듬어줘야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면? 단순 요구사항을 구현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개발자의 가치를 증명할 수 없다. 물론 도메인에 대한 이해와 유지보수성의 고려, 협업 측면에서 아직은 인간 고유의 영역이 있다고도 느끼지만 이또한 AI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시대이다.
창의성의 재정의.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 게 창의성이든 문학성이든 뭐든 간에, 그걸 인간만 가질 수 있다고 말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알파고가 주는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아름다운 코드를 인간만 짤 수 있다고 말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평가의 스펙트럼
바둑은 승패라는 절대 기준이 있어서 AI가 “더 잘한다”는 게 반박 불가능했다. 좋은 코드는 비교적 평가하기 용이하다. 테스트, 성능, 가독성으로 측정할 수 있으니까. 좋은 소설의 기준은 암묵지에 비교적 더 의존한다.
내 생각에 바둑 — 코드 — 소설 순으로 평가가 명확하다. 바둑은 승리가 목표라고 할 수 있고, 코드는 돌아가는지 여부는 명확하지만 좋은 코드의 기준은 흐리고, 소설은 무엇이 좋은 소설인지조차 합의가 안 된다. 평가가 쉬운 쪽이 AI에 더 빨리 뚫리는걸까. 바둑이 먼저 무너졌고, 코드도 따라가고 있다.
맥락도 학습 가능하다.
코드는 바둑보다 기준이 모호하니 AI가 대체하기 어렵지 않을까? 하지만 좋은 코드의 기준이 맥락에 따라 다르더라도, 그 맥락을 입력으로 넣으면 AI가 잘할 수 있다. 회의 내용이나 의사결정 레거시를 잘 관리할 수 있다면, 유지보수 좋은 코드도 AI의 영역이 된다. “자료를 잘 관리하는 것” 자체가 앞으로 개발자의 핵심 역할이 될 수도 있겠다. 근데 그걸 개발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언어의 균열.
언어는 도구다. 그 도구에 기대지 않는 인공지능이 언어라는 도구에 기대야만 하는 인간들보다 더 훌륭하게 과제들을 수행할 때, 언어에는 균열이 생긴다.
AI에게 글을 쓰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비슷한 글을 입력으로 넣는 게 낫다. 언어는 근사치일 뿐이고, 예시가 더 정확한 명세일지도 모르겠다. AI끼리의 소통한다면 인간의 언어의 한계를 넘어 이런 것들도 더 정확히 전달할 수 있을까?
좋은 예제가 경쟁력.
인스타 콘텐츠 초안을 AI로 종종 작성하는데, 좋은 예제를 많이 만들어두는 것이 유리하다. 좋은 예제가 쌓일수록 AI에게 더 정확한 명세를 줄 수 있다. 좋은 것을 알아보는 미감, 그리고 그걸 예시로 축적하는 것이 AI 시대의 경쟁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감이라는 간극.
누군가 내 인스타 게시물을 퍼가 AI로 영상화한 적이 있다. 별로였다. “할 수 있다”와 “좋은 결과물을 낸다” 사이에는 간극이 있고, 그걸 판단하는 게 미감이다. 요즘 바이브 코딩으로 대충 만든 서비스와 콘텐츠가 넘친다. 어떻게 만드냐보다 뭘 만들었는지가 중요한 시대다.
마침 오늘 뉴스레터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No Skill. No Taste.
모욕당한 신성함.
ChatGPT로 지브리 스타일 프사를 만드는 게 유행했다. 거부감이 드는 사람을 이해한다. 그림체는 누군가의 자산인데 따라하기가 너무 쉬워졌으니까. 어떤 웹툰 작가 인스타에서 “AI 쓴 건 아니라서 다행이에요”라는 댓글을 본 경험이 생각난다.
내게는 사람들이 자기 부족의 중요한 토템을 모욕당해 화를 내는 원주민처럼 보였다.
AI가 쓴 보고서는 보이콧 대상이 안 되는데, AI가 그린 그림에는 왜 화가 날까. “인간적 창작”이라는 신성함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코드에서는 이런 반응이 덜하다. 코딩 스타일이 그림체만큼 정체성으로 여겨지지는 않아서일까?
일본도의 비유.
일본도 같은 칼로 요리를 할 수는 없다. 과연 쓰는 사람이 기술의 용도를 정할 수 있는 것일까? 일본도의 용도는 일본도를 만든 장인이 거의 정한 것 아닐까? 우리는 과학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는 헛소리를 경계해야 한다.
“기술은 도구일 뿐이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도구가 우리를 바꾸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 우리가 도구를 선택하고 있다고 믿는다.
저항성 없는 개발자.
근미래 기술이 우리 삶과 사회의 소중한 가치들을 훼손하는 것은 내게 당대 현실의 문제로 다가왔다.
나는 기술에 저항성이 크게 없다. 새 기술이 나오면 써보고 편하면 받아들인다. 저자는 소설가라 가치 훼손을 민감하게 느끼는데 기술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기술이 바꾸는 가치를 인식하기 어렵다는 역설이 있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이런 고민을 했을까.
주체에서 보조 인력으로.
소설을 쓸 때 나는 내가 주체적으로 일한다는 사실이 좋다. (…) 결과물의 질이 뛰어나더라도 내가 주체가 아니라 보조 인력이라고 느낀다면 나는 ‘내 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개발자의 자존감은 어디서 와야 할까.
약인공지능의 시대에는 코드를 직접 짜는 기술에서 좋은 코드를 알아보고 방향을 잡는 기술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AI 결과물의 질을 판단하는 능력,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 능력.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AI가 대체할 수 없다. 콘텐츠는 점점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만든 사람과 얽히게 될 것이다.
서사가 가치의 기준.
탁월함을 첫 번째 목표로 추구하지 않을 때 예술은 무엇이 될까?
알파고라는 절대적인 실력의 존재가 등장하고 나서 바둑 시장에서는 실력보다 스토리가 더 중요해졌다고 한다.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논리를 밀고 나가면, 서사가 가치의 기준이 되는 세상이 올 수 있다. 한번 유명해지면 탁월하지 않은 결과물로도 지지를 얻는다. 모두가 마케터가 되어야 할 수도 있겠다.
끝없는 추격전.
책에서 AI에게 대중성을 가르쳐 베스트셀러를 찍어내는 상상이 나온다. 사진이 등장했을 때 회화가 인상주의, 추상으로 간 것처럼 인간은 더 독특한 방향으로 갈 수 있을까. 하지만 AI는 그 방향도 다시 학습한다. 사진과 달리 AI는 도망친 곳까지 따라온다.
모두를 위한 건 누구에게도.
세스 고딘은 ‘마케팅이다’에서 말한다. 모두를 위한 건 누구에게도 어필하지 못한다. 어차피 개인이 매스 대중에게 어필하기는 힘들다. 내가 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진짜인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AI가 베스트셀러를 찍어내든 크게 달라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계산기에 아파하는 사람은 없다.
계산기가 있으니 자기 계산 잘한다고 어필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대체될 줄 몰랐던 분야에서 기계가 대체하니까 혼란이 크다.
흔들리지 않는 법.
나는 AI 시대가 공허의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한다. 평범한 인간들이 가치를 잃어버리고, 가치로부터 소외되는.
마음가짐에 대한 콘텐츠가 유행할 수 있겠다. “어떻게 더 잘하느냐”가 아닌 “어떻게 흔들리지 않느냐”의 방향으로. 종교가 다시 힘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요즘 불교가 유행인 것처럼.
감정까지도.
AI 챗봇과 연애한다느니, 감정적으로 얽매인다느니 하는 뉴스를 보면 인공지능이 감정까지 일으킬 수 있는 것 같다. 저자는 인간의 격렬한 감정이 다른 인간이 있어야 성립한다고 보지만, 이미 그 전제가 흔들리고 있는건 아닐까.
지금 할 수 있는 일.
강인공지능까지 가면 논의가 SF가 된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 약인공지능을 열심히 쓰면서 시대의 속도를 따라잡는 것. 바둑에서도 AI를 거부한 기사는 도태되고 받아들인 사람이 살아남았다. AI로 생산성을 키우는데 집중하자.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AI가 공부를 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예전에는 문서를 뒤지며 배웠는데 이제 AI와 대화하면서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더 넓어진 역량에 집중해보자.
그런데 꼭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게 있어야 할까? AI가 사람만큼 잘해도 나만의 스토리가 있다. 하지만 AI가 가짜 페르소나로 인간인 척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이것도 강인공지능정도는 나와야겠지. 아직은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아마) AI로 만들어진 작품 뒤에는 모두 잘 조율하는 사람이 있는 듯하다.
찾아보니 AI 버튜버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기존의 인터넷 방송에 비해 실제 사람이 개입하는 부분이 적거나 아예 없이, AI가 캐릭터의 활동을 전적으로 제어하는게 큰 특징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개발자의 개입이 필요하긴 하지만, 버츄얼이라는 개념에 좀 더 가까운 새로운 형태의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사람 자체에 대한 진정성이 중요하다. 그 진정성을 전할 수 있는 미감과 판단력을 키우는 것.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